오타쿠 축제라고? 비주류가 '주류'로 떠오른다
[WEEKLY BIZ] 5회 '일러스타 페스' 현장 찾았더니, 표 사려고 2km 장사진...주류 위협할 블루오션
서브컬처는 단순히 일본 애니메이션풍의 콘텐츠를 즐기는 오타쿠 문화만을 칭하는 말은 아니다. 대규모 자본이 투입돼 제작·유통되는 주류 콘텐츠가 아닌, 실험적이고 개성 강한 소재와 다양화된 장르의 비주류 콘텐츠를 모두 아우른다. 그런데 비주류 문화로만 남을 줄 알았던 이 서브컬처의 저변이 국내에서도 비약적으로 성장해 주류에 도전할 수준에 이르고 있다는 평이다. 지난해 1월 시작된 일러스타 페스도 첫 회부터 참관객 규모가 1만명을 훌쩍 넘더니, 3회 차엔 3만5000명이 박람회장을 찾았다. WEEKLY BIZ는 이번에도 2만명 넘게 찾은 5회 일러스타 페스 현장을 찾아 서브컬처의 발전 동인과 잠재력이 무엇인지 알아봤다.
◇눈치 볼 필요 없는, 덕후들의 축제
일러스타 페스는 그야말로 서브컬처를 즐기는 이들의 축제다. 분홍색이나 하늘색 가발에 일명 ‘세일러복’으로 불리는 일본풍 교복을 입은 깡마른 남성들이 행사장 밖에서부터 여행용 가방을 들고 뛰어다니는가 하면, 자신의 키의 1.2배는 돼 보이는 커다란 검 모형을 들고 사뿐사뿐 걸어다니는 여성도 있었다. 코스튬 플레이어(Costume Player), 소위 ‘코스어’들이 장내 어디로 눈을 돌리더라도 최소 서넛은 눈에 들어왔다. 이 비주류들은 평소엔 주류들 사이 눈치를 봤을지 몰라도, 이날만큼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모조리 풀어내는 모습이었다. 평범한 옷차림의 참관객들도 요란한 차림의 이들이 누구를 흉내 냈는지 대번에 안다는 듯이 알은 척을 하며 “사진 한 번 찍어도 되나요” 하고 조심스레 묻곤했다. 사진 부탁을 받은 이들은 밝은 미소와 함께 모형 권총의 총구에 ‘후~’ 하고 바람을 불어내는 포즈를 해보이는 식이었다. 행사 관계자는 “서브컬처 행사는 코스프레를 하는 분들에겐 자신들이 그간 준비한 퍼포먼스를 보여줄 수 있는 좋은 기회”라며 “같은 캐릭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공감대가 형성되니 몇 달간 준비해 오시는 분도 많다”고 했다.
24~25일 양일간 행사가 진행된 세텍의 세 개 전시관 가운데 두 개 전시관엔 ‘2차 창작물’을 만들어 낸 아마추어 작가들의 작품 전시·판매장이 꾸려졌다. 2차 창작물이란 원작 캐릭터를 이용해 그린 그림에서부터 스티커나 머그컵, 피겨 등 팬들이 만드는 다양한 작품을 뜻한다. 나머지 한 개 전시관 무대에선 서브컬처를 주제로 한 다양한 공연이 이어졌다. 이른바 ‘오타쿠(골수 마니아)’로 불리던 이들의 축제가 서울 강남 한복판에 성대하게 펼쳐진 셈이다.
◇스트리밍·커뮤니티 타고 확대·재생산
비주류 저변이 이렇게 넓어진 까닭은 뭘까. 산업연구원이 내놓은 ‘콘텐츠 산업에서의 서브컬처 트렌드 및 시사점’에 따르면, 서브컬처는 최근 사회적 인식 변화와 팬덤에 기반한 파급효과, Z세대의 서브컬처 선호 등으로 주류 문화로 부상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이 보고서에선 일본의 오타쿠 시장 규모가 2021년 6687억엔(약 6조원)에서 2022년 7164억엔으로 성장했으며, 중국의 서브컬처 이용자수도 2019년 3억9000만명에서 2022년 4억명 이상으로 늘었다고 분석했다.
서브컬처는 코로나 팬데믹 기간 급성장한 음원·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를 발판으로 급속히 확산한 측면도 있다. 글로벌 스트리밍 서비스가 성장하면서 전 세계 다양한 콘텐츠를 실시간으로 접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됐고, 이들 서비스에 자동 자막 기능이 생기면서 콘텐츠의 국경도 사라졌다. 특히 Z세대를 중심으로 퍼지는 ‘힙스터’ 문화가 서브컬처의 소비를 더욱 부추겼다는 게 전문가들 분석이다. 힙스터 문화는 1940년대 미국에서 젊은 재즈 ‘비밥’ 장르 애호가를 일컫는 용어로, 현재는 대중문화에 편승하지 않고 자신만의 취향과 개성이 반영된 소비 문화를 일컫는다. 삼정KPMG의 ‘엔터테인먼트·미디어 산업의 미래를 향한 콘텐츠 다양화 전략’ 보고서는 “개성과 다양성, 가치소비를 중시하는 트렌드가 확대되며 사회에서 서브컬처 전반에 대한 수용도가 높아지고, 관련 소비가 늘고 있다”고 분석했다.
Z세대가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한 소통을 선호한다는 점도 서브컬처의 확산을 가속화하고 있다. 비주류 문화의 팬이라고 해서 골방에 파묻혀 혼자 즐기는 것이 아니라 커뮤니티를 통해 뭉칠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특히 서브컬처의 팬들은 콘텐츠 그 자체를 즐기는 것을 넘어 이를 활용한 2·3차 창작물을 제작하고 공유하는 것을 즐기는데, 온라인 커뮤니티가 이런 문화의 놀이터 역할을 했다는 분석이다.
◇주류 문화에 도전하는 서브컬처
비록 마니아들 위주의 콘텐츠이지만 주류 시장에서 주목받은 사례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넥슨의 자회사 넥슨게임즈가 2021년 출시한 게임 ‘블루 아카이브’의 경우 한국과 일본에서 인기 1위를 차지했고, 출시 이듬해 북미 최대 규모의 게임 시상식 더게임어워드에서 인기상(팬 투표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중국의 호요버스가 2021년 만든 게임 ‘원신’은 구글 플레이 매출 1위에 올랐을 뿐 아니라, 일본의 유명 애니메이션 ‘귀멸의 칼날’ 제작사인 유포터블이 애니메이션으로도 제작 중이다.
다만 실제 축제 현장에선 서브컬처를 ‘돈 벌이’ 삼으려는 목적보단 그저 그 자체로 행복하기 때문에 즐긴다는 반응이 많았다. 일러스타 페스에서 자신이 직접 만든 피겨, 인형 등 2차 창작물을 팔던 김희덕(가명)씨는 “자신의 창작물을 일러스타 페스에 들고 나와 ‘돈 벌어 가야지’ 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으로 안다”며 “코스프레도 준비에만 석 달 이상 걸려 손이 많이 가는 작업이지만, 같은 취미를 공유하는 사람끼리 모이는 것 그 자체가 즐거워 다들 준비하고 참여하는 것”이라고 했다.
☞서브컬처(Sub-culture)
주류 문화가 아닌 하위 문화를 일컫는 용어. 미국 시카고대 사회학 교수였던 데이비드 리스먼이 비주류 문화라는 의미로 1950년 처음 사용했다. 모든 비주류 문화를 아우르지만, 이른바 ‘오타쿠’로 불리는 이들이 즐기는 일본풍 만화, 애니메이션, 피겨 등이 대표적인 서브컬처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