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부장 토모에☆마기카

들개처럼 연출하다 - 프롤로그

카나메 마도카 2024. 9. 24. 21:42

"PD로서 누릴 것 다 누린, 유일한 분일 겁니다."

얼마 전, 후배 PD들과의 회식 자리에서 어느 PD가 나에게 한 말이다.

"명예도 얻고, 돈도 벌고, 하고 싶은 거 다 해 본 PD가 어디 있습니까?"

정말 그런가? 나는 처음으로 지난 35년간의 PD 생활을 돌아봤다. 그동안 만든 프로그램들이 거의 대박이 났고, 시청자들이 '쌀집 아저씨'라고 좋아해 주고, 심지어 중국에 진출해서 돈까지 벌었으니 그렇게 생각할 만했다.

김영희 PD. 정말 운이 좋았다. TV가 권력인 시대에 PD가 된 것부터, 30%~40%의 시청률을 넘나들며 제작비에 구애받지 않고 뭐든 할 수 있었으니 정말 대단한 행운이었다. 게다가 나는 좋은 스태프와 연기자를 만나는 운까지 따랐다. 새로 만드는 프로그램마다 성공했고 자신감이 충만했다. 거칠 것이 없었다. 전례가 없는 새로운 것일수록 더 도전하고 싶었다. 실패한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 않았다. 어디서 오는 자신감이었을까? 거듭된 성공에서 온 자기 확신이었을까?

나는 태생적으로 긍정적이다. 뭘 하든지 잘 될 것이라는 생각이 언제나 앞섰다. 학창 시절도 그랬고 PD 시절도 그랬다. 한 가지 믿는 것이 있어서였을까? 남들보다 잘할 자신은 없어도 열심히 할 자신은 있었다. 목표를 정하면 밤잠을 자지 않고 열심히 했다. 다른 PD들이 잠을 잘 때도 눈을 부릅뜨고 편집했다. 며칠 밤을 새워도 끄떡없었다. 다행스럽게도 스태프와 여녜인들은 나를 따라 줬고, 프로그램은 성공했다 '몰래카매라'도 '양심 냉장고'도 <!느낌표>도 '칭찬합시다'도. 심지어 50대에 만든 <나는 가수다>도 정말 대박이 났다. PD가 된 후 나는 남들보다 정말 열심히 일했다.

 

"쟤는 왜 빈 옷걸이를 들고 오니?"

김용만, 유재석과 떠난 유럽 촬영이 얼마나 강행군이었던지, 새벽 3시에 비몽사몽, 옷이 사라진 줄도 모르는 코디가 빈 옷걸이만 들고 버스를 탔다. 6박 8일, 7개국 촬영이라는 일정이 모두를 힘들게 해 생긴, 웃지 못할 풍경이었다. 지금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2002년의 여름은 그랬다. 촬영이 끝나갈 무렵 로마의 한 공원에서 책 읽는 사람들을 인터뷰했다. 공원이 얼마나 넓은지 초원을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지 않으면 제대로 마칠 수 없는 형국이었다. 숨이 차올라 헉헉대던 유재석이 갑자기 말했다.

"형, 우리 이거, 들개들 아니에요? 먹잇감을 찾아다니는 들판의 들개?"

모두가 빵 터졌다.

그렇다. 나는 중국에서도 야전을 누볐다. 영하 30도의 하얼빈에서 영상 30도의 타이페이로, 칭다오의 뒷골목에서 광저우의 농촌으로 600명의 스태프를 이끌고 날아다녔다. 비행기 한 대로는 이동할 수가 없어 시차를 두고 나누어 탔고, 촬영지 이동을 위해 차량 100대를 운행하기도 했다. 요리사를 고용해 24시간 야전 식당을 차리고 스태프용 여관을 10개씩 통째로 빌렸다. 다행히도 까다롭기로 유명한 중국의 연예인들과 스태프들이 나를 따라 줬고, 중국에서의 첫 프로그램을 멋지게 성공시켰다.

 

이렇게 35년간, TV라는 야생의 들판에서 들개처럼 뛰어다닌 나의 연출 이야기를 지금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