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대구 안심마을…진짜 이모는 없는데, 이모들이 넘쳤다
[새해 기획] 사람과 사람 잇는 대구 안심마을 ②
교사들 사이에서 말이 돌기 시작했다. 이곳에 온 지 그리 오래잖은 교사가 아이들을 야외 의자에 앉혀놓고는 한다고 했다. 추락 위험 탓에, 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아이가 자신의 머리채나 안경을 잡아당기면 머리를 쥐어박는다고도 했다. 누구라도 욱할 수 있지만, 그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면 발달장애아와 함께할 수 없다. 원장 윤문주(사회복지법인 한사랑 대표이사)의 귀에도 말이 들어왔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인권’은 한사랑 어린이집 개원 이래 맨 앞에 내세워온 가치 가운데 하나였다.
해당 교사와 면담했다. 사실관계를 묻자 교사는 부인했다. 자차분하게 건넨 말은 격하게 돌아왔다. 교사는 그를 직장 내 괴롭힘으로 지방노동청에 고발했다. 윤문주는 양쪽으로 대응했다. 한쪽은 법정 싸움이었다. 교사의 행위는 대법원까지 거쳐 사실로 확정됐다. 다른 한쪽은 부모들과 관계기관들에 ‘자수’하는 거였다. 이런 소식이 알려지면 어린이집 하나 속수무책 문 닫는 것쯤 일도 아니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어린이집 운영의 투명성 또한 포기할 수 없는 원칙들 가운데 하나였다.
한사랑 어린이집 우선 가치는 인권
아이 부모는 충격이 이만저만 아닐 터였다. 다른 부모들도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사태는 윤문주의 ‘각오’가 무색해질 만큼 사뭇 다르게 전개됐다. 아이 부모는 계속해서 아이를 맡기겠다고 했다. 다른 부모들의 충격과 실망도 차츰 어린이집의 위기를 제 일처럼 여기는 안타까움으로 옮겨갔다. 졸업 동문 학부모들까지 나서 어린이집이 처한 사정과 맥락을 동네에 가만하게 입소문 냈다. 윤문주는 “긴 시간 쌓인 믿음, 그리고 ‘마을’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했다. 2014년의 일이다. 마을은 ‘사건’을 전화위복시켰다.
예나 지금이나 한사랑 어린이집은 부모로서 문 닫는 걸 지켜보기만 할 수 있는 ‘어린이집 하나’가 아니다. 양쪽은 돌봄 제공자-이용자라는 매끈한 이분법으로 나뉠 수 없다. 서로 엮여 있다. 학부모들 사이도 다르지 않다. 지금 학부모끼리, 예전 학부모끼리, 선후배 학부모끼리도 엮인다. 형상은 고정되지 않는다. 수많은 형상이 실뜨기하듯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모임 사이, 모임과 모임 사이에서 생성되고 변형된다. 그 관계들이 다시 연결되고 쌓여서 마을을 이루고, 생성·변형의 힘과 방식은 안심마을 전체에 걸쳐 작동한다.
한사랑 어린이집은 안심마을사(史)의 첫 장에 기록된다. 1990년대 저소득 중증 장애아들을 위한 조기교육실로 시작한 뒤 어린이집으로 전환해 몇차례 이삿짐을 싸다 2002년 안심지역에 자리잡았다. 교사들도 출자하고 정부 지원금까지 보태 어렵게 땅을 사고 건물을 올렸다. 연탄공장, 시멘트공장에다 공군기지에서 뜨고 내리는 전투기 소음까지 감내하며 이곳을 선택한 사정과 자식 교육을 위해서라도 언제든 뜰 수 있는 날을 기다리는 주민 다수의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저렴한 땅값과 집값은 양쪽을 잇는, 가느다랗지만 유일한 선이었다.
그해, 이화선(‘안심마을 사람들’ 운영위원장)은 이 지역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강은자(‘마을과 자치 협동조합’ 이사장)도 그즈음 결혼해 이사 왔다. 이화선은 연년생으로, 강은자는 2년 터울로 아이를 얻었다. 그러고는 2009년 나란히 첫아이를 한사랑 어린이집에 보내며 학부모가 됐다. 장애 전담이었던 한사랑 어린이집은 2007년 비장애아에게 문호를 개방한 터였다. 날이 갈수록 아이를 입소시키려는 비장애아 부모들의 바짓바람, 치맛바람이 거세졌다. 두 사람도 일찌감치 ‘대기’를 걸고 기다렸다.
놀고 싶다면 바로 어디든 ‘가자, 마실’
‘안심에서 놀고 자란다’(2018)는 안심마을 교육공동체에 관한 책이다. 한사랑 어린이집을 다룬 첫 장의 제목은 ‘안심마을 엄마의 독특한 치맛바람’이다. 이 장을 쓴 김규희는 단골가게에서 “좋은 일 한다”며 칭찬을 들었다고 한다. 말뜻은 모르지 않았으나, 다소 생뚱맞았다. 엄마들 마음은 같았다. “그땐 통합보육에 큰 관심이 없었다. 아이 잘 키우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이화선은 “아이들이 다 같이 안전하게, 자유롭게 자라기를 바랐다. 여기저기 알아봤더니 한사랑이 기대에 가장 부합하더라”고 했다.
편견 없는 눈은 밝은 눈이다. 부모들은 장애아를 위해 갖춰야 할 조건이 비장애아에게도 좋은 조건임을 대번에 알아봤다. 원아 수 대비 교사 수부터 여느 어린이집과 비교되지 않았다. 맹목적인 조기 경쟁교육에 거리를 두는 부모들은 여기가 노는 데 진심인 것에도 끌렸다. 놀고 싶다는 아이가 있으면 교사는 원장에게 보고하지 않고 아이들과 바로 어디든 마실을 간다. 아이들은 교사에게 반말을 하는데, 선택은 어디까지나 아이 몫이다. 교사와 아이들 모두 자기결정권을 존중받으며 서로를 존중한다.
통합보육은 한사랑 어린이집의 숙원이었다. 안심지역으로 오기 전 어린이날 연합행사에서 장애아의 대등한 참여를 주창해, 이듬해 장애아와 비장애아가 일대일 짝을 이룬 행사를 성사시킨 경험도 있다. 그러나 교사 수를 비롯해 통합보육의 조건을 충족하려면 시간과 노력을 더 들여야 했다. 이 지역에 이사 와 마당이 생기자, 동네 아이들이 울도 담도 없는 마당 모래밭에 들어와 놀았다. 부모들은 정색하며 아이를 데려갔다. “서두르자.” 윤문주와 사회복지법인 한사랑 사무국장 김정화 등 몇사람이 자기 조카와 딸 등을 먼저 입소시켰다.
난관은 예상 수준을 넘어섰다. 비장애아들이 도무지 어린이집 환경에 적응하지 못했다. 그들이 수적으로 너무 소수라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다른 데 같으면 장애아들이 늘 겪는 일이었다. 정치판으로 치면 여야가 바뀐 셈이다. 비장애아들에게도 ‘무리’가 필요해 보였다. 더 많은 지인들이 나서서 제 아이를 입소시켰다. 그 수가 늘면서 비장애아들의 적응도 차츰 수월해졌다. 동시에 발달장애아들에게도 변화가 나타났다. 양쪽이 부딪치고 다툴 일이 생기면 장애아들이 비장애아들의 또래 언어를 쓰기 시작했고, 또래 놀이문화도 공유할 수 있게 됐다. 윤문주는 이를 “대등성이 형성된 것”이라고 표현했다.
‘대등성’은 세심하게 고른 표현으로 들렸다. ‘연대’나 ‘소통’ 같은 화학적 반응에는 아직 이르지 않은 단계, 다만 상대의 존재 자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단계를 정밀하게 영점 조준한 듯했다. “처음에는 일부러 손잡고 어울리게 했다. 그 나이의 아이들한테는 서로 불편해하지 않으면서 한 공간에서 일과를 보낼 수 있기까지도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됐다.” 윤문주는 “지금은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정도”라며 “아이들은 서로 무시하며 따로 놀기도 하고 함께 어울려 놀기도 한다. 그때그때 다르다”고 했다.
통합보육이 첫발을 뗄 무렵, 안심지역에서 또 다른 움직임이 시작됐다. 2007년 1월, 동네 지인 네명이 모였다. 유길의(‘커뮤니티와 경제’ 산하 협동조합지원센터장)와 김영숙(대구시 마을공동체 만들기 지원센터장)은 각각 대구참여연대 동구주민회의 운영위원장과 사무국장이었다. 동구주민회는 풀뿌리 지역운동을 표방하며 이런저런 활동을 해온 터였다. 유길의는 “주민회 이름으로 구정 감시활동도 하고, 개인적으로 학교 운영위원이나 아파트 동대표도 하고 조기축구회 같은 것도 꾸려봤는데 결과가 기대에 못 미쳐 고민하던 때였다”고 했다. 세번째 사람은 안심백인청년회라는 토박이 모임의 회장 서창환이었다.
안심지역은 젊은 부부도 많고 어린아이도 많은데, 교육 여건은 그에 반비례했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안심하고 책 읽으며 놀 수 있는 도서관이 없었다. 가장 가까운 공공도서관이 버스 타고 1시간 가까운 거리였다. 변변한 서점조차 없었다. 이들은 마을 어린이도서관을 만들기로 결의했다. 어떤 도서관이냐 못지않게 어떻게 도서관을 만들고 운영할지도 중요했다. 지역 주민이 이용자에 그쳐서는 안 된다. 공동소유자이고 운영자여야 한다. 앞선 풀뿌리 지역운동의 시행착오에서 나온 결론이었다.
동구주민회 활동가들과 한사랑 어린이집 학부모들, 원주민들로 준비위원회가 꾸려졌다. 주민 설문조사를 하고, 펼침막을 걸고, 초청 강연도 했다. 달아오르는 공기를 피부가 먼저 느꼈다. 그렇게 여론을 띄운 뒤 십시일반 돈을 추렴하고, 거리에서 돼지저금통을 ‘분양’하고, 후원회원을 모으고, 리어카로 지역을 누비며 책을 기부받았다. 대구시의 첫 마을지원 사업에도 응모해 500만원을 받았다. 허름한 상가 건물 2층을 임대했다. 인테리어 공사는 솜씨 좋은 백인청년회가 앞장섰다. 요일별 오전·오후 자원봉사 사서들도 구성됐다. 2008년 10월4일 ‘반야월 행복한 어린이 도서관 아띠’(아띠 도서관)가 문을 열었다.
‘친척’을 만들어내는 ‘공동체의 힘’
공기가 뜨거워지는 건 억눌린 욕구가 터져 나온 탓이다. 결핍의 실체가 드러나는 것도 그때다. 아띠 도서관의 설립과 운영 과정에서 분출된 열기는 이 지역 돌봄·교육 인프라의 결핍에서만 비롯된 게 아니었다. 아띠 도서관과 연결된 여성들은 그때까지 자기 일상이 고립되고 소외됐음을 비로소 알게 됐다. “아띠에 한번 발을 담그면 늪에 빠져 발을 뺄 수 없게 된다.” 2대 관장(2011년 6월~2018년 2월)이었던 김연희는 “무엇보다 엄마들끼리 뭐든 스스로 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김연희는 결혼 이듬해인 1994년 이사 와 아이 셋을 기르는 데만 매달려 살았다. 모임 같은 데도 나가지 않았다. 아띠 설립 과정에 참여할 기회도 닿지 않았다. 개관 뒤 대안교육 강의하는 자리에 갔다가 수요일 사서가 비게 됐다고 해서 “늪에 빠졌다”. 아이들 주변에 먼저 변화가 나타났다. 진짜 이모는 없는데, 아띠만 오면 이모들로 넘쳤다. 예전에는 몰랐던 어른들이 거리에서 이름을 불러주고 핫도그를 사 줬다. 김연희는 아이들이 훨씬 안전해진 걸 알 수 있었다. ‘친척’을 만들어내는 ‘마을’의 힘이 느껴졌다.
엄마들의 변화는 더 급진적이었다. 김연희는 미술치료 프로그램을 하면서, 딸이라며 억압받던 성장기의 상처를 발견했다. 다른 엄마들도 같은 상처를 갖고 있었다. 상처를 공유하며 치유와 연대감을 느꼈다. 매일 아들을 데려와 몇시간씩 조용히 책만 읽어주고 가는 엄마가 있었다. 유독 말수가 없어 눈에 더 띄었다. 부러 말을 걸었다. 조금씩 대화가 쌓이다 보니 마음의 병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마침 시내버스 단기 청소 자리가 났다. 그 엄마까지 넷이 일주일 동안 버스 청소를 하며 어울렸다. 사람이 달라졌다. 사서를 자원하더니 몇달 뒤부터 보육교사 공부를 해서 자격증 따고 취업까지 했다.
“셋만 모여도 뭐든 다 됐다.” 관장이 된 뒤 사서 자원봉사자들 각자의 숨은 재능이 쓸모로 꽃피는 걸 봤다. 외부 프로젝트 공모가 뜨면 다 같이 머리를 맞대고 제안서를 만들어 사업을 따 오고는 했다. 사라졌던 학구열도 솟아났다. 국비가 지원되는 조리사, 전산회계, 보육교사 공부를 찾아다니며 했다. 한사랑 어린이집의 아이들과 책을 정리하다 대학 편입을 결심하게 됐고, 행동치료학을 전공했다. 평생교육사, 사회복지사 자격증도 땄다. 장애에 대해 알아가는 만큼 자신도 성장하고 있었다. 그는 관장에서 물러난 뒤 ‘한사랑 장애인 지역 생활 지원센터’에서 일하고 있다.
앞서 2007년 1월 ‘도원결의’에 넷이 모였다고 했는데, 마지막 한 사람을 빠뜨렸다. 윤문주였다. 마을 어린이도서관 프로젝트는 애초 한사랑 어린이집과도 연결돼 있었다. “지역과의 연계 없인 발달장애인의 돌봄도, 삶도 없다.” 어린이도서관은 ‘관계 중심’ ‘아동 인권’ ‘생태’와 함께 ‘지역사회 연계’라는 예사롭지 않은 보육 철학을 내세운 이 어린이집에 없어서는 안 될 교두보였다. 통합보육이 초기 시행착오를 넘어 금세 자리를 잡은 데에도 아띠 도서관 부모들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이화선도 강은자도 아띠 엄마였다. 한사랑 어린이집이 강조하는 ‘관계’와 ‘연계’는 일방통행이 아니다. 어린이집의 발달장애아는 아띠 도서관에 가서 놀고, 아띠 도서관의 비장애아는 한사랑 어린이집에 입소해 논다. 강은자는 이 관계가 자신의 생애 안으로 수렴됐다. 첫째를 한사랑 어린이집에 보낸 뒤 둘째가 발달장애아로 태어났다. 둘째는 한사랑 어린이집을 초등부까지 다녔고, 강은자는 13년 동안 학부모로 지내며, 자모회장을 맡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은 안심협동조합(‘땅과 사람 이야기’)에서 일하는 명준의 활동지원사로 돌봄노동도 수행하고 있다. 돌봄은 돌고 돈다.
자원봉사자 재능이 ‘쓸모’로 꽃피워
“장애아든 비장애아든, 아이 키우는 건 무척 힘든 일이다. 온 마을이 필요하다지 않나. 나는 여럿이 함께해서 적은 에너지로도 감당할 수 있었다. 지금은 아이들이 사춘기를 지나고 있는데도, 경험 많은 선배 부모들을 봐온 덕에 엄마 노릇 하기가 수월하다.” 강은자는 “큰딸 채영이는 고등학생이 되더니 어려서부터 자기주도적인 선택권을 준 것을 고마워한다”며 “이미 학원에 질린 학교 친구들과 달리 아띠나 ‘둥지’에서 열심히 놀아서 학원에 다닐 만하다고 한다”고 했다. 방과후 교실인 둥지(‘마을학교 둥지 사회적협동조합’)는 그가 오랫동안 사무국장을 맡았던 곳이다.
강은자는 ‘아띠’가 ‘아 띠놓고’(애 떼어놓고) 한다는 뜻이라는 우스개를 몸소 구현하며, 누구보다 마을 일에 열심이다. 몇군데나 참여하느냐고 묻자, 손가락을 꼽다가 포기한다. 남편 이형배(안심에너지협동조합 이사)와 합치면 몇배는 복잡해진다. 그는 언젠가 안심마을을 찾은 어느 발달장애아 아빠한테서 ‘여태 만나본 장애 부모 중에서 표정이 가장 밝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그저 마을에서 즐겁게 놀았을 뿐인데….” 강은자가 이를 환하게 드러내고 웃는다.
안영춘 기자 jona@hani.co.kr
안심마을의 단체와 사람들 ②
<내부 단체>
△마을과 자치 협동조합: 도시재생, 사회적 경제, 주민자치 등 지속가능한 마을공동체를 위해 정부 정책과 연계한 교육과 컨설팅, 연구사업 등을 하는 ‘직원협동조합’이다. 안심마을에서 축적된 경험과 노하우를 전국적으로 확산하기 위해 사회적 경제 이론을 더해 2019년에 설립했다.
△안심에너지협동조합: 안심마을햇빛발전소 1호기를 운영하고 있다. 수익으로 마을 공동체 활동과 자산화 활동,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탄소중립 활동 등을 하기 위해 만들었다. 2020년 11월, 대구 혁신도시에 있는 신용보증기금 직원 숙소 옥상에 태양광 패널을 설치하고 발전을 시작했다. 안심마을의 협동조합 가운데 드물게 안정적인 수익을 내고 있다.
△대구참여연대 동구주민회: 참여를 통한 풀뿌리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지역 주민단체. ‘반야월 행복한 어린이 도서관 아띠’ 설립과 초기 운영을 주도했다.
△한사랑 어린이집/ 반야월 행복한 어린이 도서관 아띠/ 안심협동조합/ 안심마을 사람들: 1일치 색인 참조.
<외부 기관>
△커뮤니티와 경제/ 대구협동조합지원센터
●커뮤니티와 경제: 대구·경북 지역 사회적기업, 마을기업, 협동조합 등의 내실 있는 성장과 지속가능성을 지원하기 위해 만들어진 사단법인이다.
●대구협동조합지원센터: 협동조합의 설립과 확산, 성장을 돕기 위해 교육과 상담, 컨설팅 등을 하는 협동조합 전문 지원기관이다. 커뮤니티와 경제가 대구시 위탁을 받아 운영해왔다.
△대구시 마을공동체 만들기 지원센터: 마을공동체 만들기 사업과 관련한 다양한 조사, 연구, 지원 등을 하고 있다. 사단법인 대구시민센터가 대구시 위탁을 받아 운영해왔다.
<사람>
△이화선: ‘안심마을 사람들’ 운영위원장. ‘마을과 자치 협동조합’ 이사. 한사랑 어린이집과 아띠 도서관 등 ‘안심마을 교육공동체’에서 학부모로 시작해 마을 활동가가 됐다.
△강은자: ‘마을과 자치 협동조합’ 이사장. 이화선과 어깨동무하듯 마을 활동가의 길을 걸어왔다. 안심에너지협동조합 이사 이형배와 부부다.
△유길의: ‘커뮤니티와 경제’ 산하 협동조합지원센터장이다. 아띠 도서관 설립 과정과 안심협동조합 설립·운영을 이끌었다. 안심협동조합 초대 이사장이기도 했다.
△김영숙: 대구시 마을공동체 만들기 지원센터장. 아띠 도서관 설립 및 초기 운영 과정에 앞장섰다.
△서창환: 안심지역 토박이. 안심백인청년회 회장으로 아띠 도서관 설립에 참여했으며, 초대 관장을 맡았다. 반야월 대동계 설립을 주도하기도 했다.
△윤문주/ 김연희/ 박인규: 1일치 색인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