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마을에는 건설교통부와 환경부가 있다…다름을 허무는 집단지성
[새해 기획] 사람과 사람 잇는 대구 안심마을 ③
마을 공동체의 능동적 진화
‘반야월 행복한 어린이도서관 아띠’(아띠 도서관)에 운영위원들이 둘러앉았다. 복지일자리 지원을 받아 이곳에서 일하는 발달장애 청년의 말 못할 고충을 논의하기 위한 자리였다. 표정들이 자못 심각했다. 아띠 도서관 내부는 운영자와 이용자들의 정성 어린 손때로 윤기가 돌았으나, 입주해 있는 건물은 지은 지 수십년이 지난 탓에 화장실도 좌변기가 아니라 화변기였다. 청년은 쪼그려 앉지 못해 문을 활짝 연 채 다리를 뻗고 큰일을 봐야만 했다. 이용자들이 혼비백산하는 일이 몇차례 벌어졌다. 청년의 고충은 모두의 고충이기도 했다.
“우야노. 같이 살아야제.”
청년을 관두게 하는 건 선택지에 낄 수조차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답은 개보수뿐이었다. 2008년 개관 때 손수 인테리어도 해본 터였다. 늘 그렇듯 문제는 비용이었고, 또 늘 그렇듯 한가지 해법만으로 감당하기엔 벅찼다. 한쪽으로 모금을 하고, 다른 한쪽으로는 주민제안사업에 응모했다. 꼭 필요한 재료비만큼 돈이 마련됐다. 도서관은 ‘이쁜 모습으로 다시 만날게요’라고 임시 휴관을 공지한 다음 이틀 만에 공사를 마쳤다. ‘이쁜 화장실’의 편익은 발달장애인뿐 아니라 운영자와 이용자 모두에게 돌아갔다. ‘같이 살아야제’의 말뜻도 실현됐다.
일부의 고충은 주민 모두의 고충
안심마을 사람들은 벽이 나타나면 멈추거나 에돌지 않고 제힘으로 넘어서려고 한다. 능동적 진화를 거듭하며 유전자처럼 몸에 밴 태도다. 장애의 실체는 신체가 아니라 사회 현실에 있다고 본 무리와 풀뿌리 지역공동체를 실현하려는 무리가 조우하면서 공생진화는 시작됐다. 이 낯선 조합에서 장애(인)와 지역(주민)이 뒤섞이는 하이브리드한 꿈이 싹텄다. 그러나 현실에는 그 꿈을 배양할 만한 하이브리드한 그릇(질서와 제도)이 없었다. 새로 만들거나 어떻게든 개조하는 것, 멈추거나 에돌지 않고 넘어서야 하는 것이 그 꿈의 예정된 숙명이었다.
아띠 도서관은 여태 외부 지원 없이 백수십명의 후원자와 연인원 60여명의 자원봉사 사서의 힘만으로 책과 독서 공간의 제공을 넘어 다양한 동아리와 교육 프로그램까지 알속 있게 꾸려왔다. 다만 초창기 운영을 주도한 건 활동가들이었다. 주민들의 역할은 자원봉사 사서와 운영위원 정도에 머물렀다. 3년쯤 지나 활동가들이 한걸음 물러서기로 했다. “밥만 하고 애만 키우던 엄마들”이 전면에 나설 수밖에 없게 됐다.
2011년, 그렇게 아띠 도서관 2기가 시작됐다. 주민들로서는 자의 반 타의 반이었다. 당장 소식지부터 직접 만들어야 했다. 막막했지만 회의를 열고 일을 나눴다. 글을 쓰고 서툰 솜씨들을 보탰다. 거짓말처럼 번듯한 소식지가 나왔다. 미처 몰랐던 숨은 재능을 발견한 듯 다 같이 감격에 젖었다. 설립 당시나 1기 때와는 어딘가 결이 다른 열기였다.
필요를 싹틔우고 해결하는 공동체
아띠 도서관 설립을 주도했던 유길의(대구 협동조합지원센터장)는 2기 출범을 ‘결정적 순간’이라고 회고했다. 주민들의 주도성 확보가 안심마을이 여기까지 오는 데 중대한 계기가 됐다는 뜻이다. 아띠 도서관 1기 때 주민들은 회비 납부와 함께 주중에 엄마들이, 일요일엔 직장을 쉬는 아빠들이 사서 자원봉사를 하면서 도서관에 대한 애착을 키웠다면, 2기 이후로는 마을 일 전반에 주체적으로 참여하며 활동가다운 면모를 빠르게 갖춰갔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아띠 도서관은 안심마을 활동가를 양성하는 사관학교였다.
마을은 필요를 싹틔우고 배양하는 인큐베이터다. 한사랑 어린이집 원장 윤문주 같으면, 마을과 연계해 발달장애인의 집과 일자리, 문화 활동, 동료나 주민과의 관계 형성이라는 필요를 길러냈다. 그곳 학부모들은 제 아이가 어린이집을 마친 다음에도 마을 안에서 계속 성장하고 살아가는 데 무엇이 필요한지 구체적으로 떠올릴 수 있었다. 여기에 아띠 도서관을 직접 운영하며 얻은 경험과 성취가 보태지면서 마을 사람들의 관계를 연결해 그 필요들을 채워갈 수 있는 자신감과 노하우가 자라났다. 마을은 집단지성의 인큐베이터이기도 했다.
2011년 어름, 또 다른 차원에서 결정적 시기가 도래하고 있었다. ‘사회적 경제’가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사회적 경제는 사회적기업, 협동조합, 마을기업 등 이윤보다 사람과 공동체를 우선시하는 경제활동을 통칭하는 개념이다. 유길의는 “단체활동만으로 한계를 느끼기 시작할 무렵”이었다고 했다. 지속과 확장, 여기에 발달장애인 일자리까지 도모할 수 있는 대안이 필요했다. 학습 모임을 꾸리고, 전문가 초청 강연도 열었다. 여성들의 열정이 유난히 도드라졌다. 먹거리 매장을 운영하는 마을기업으로 방향을 잡고, ‘안심주민생활협동커뮤니티’라는 긴 이름으로 사업 준비에 나섰다.
마을기업·계…사회적 경제의 시작
안심백인청년회 회장 서창환은 아띠 도서관 만들 때 모금 경험을 살려 ‘반야월 대동계’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마을사업뿐 아니라 당장 돈이 필요한 청년들에게도 요긴할 터였다. 행정안전부의 마을기업 사업 심사를 받는 자리에서 수십명이 가입한 대동계 통장을 제시하며 ‘마을기업을 위해 만든 계’라고 설명했다. 심사위원들이 그 준비성에 혀를 내두르는 걸 보고 결과를 예상했다. 2012년 2월 대구 동구 마을기업으로 선정되고, 6월 ‘땅 이야기’라는 로컬푸드 매장을 열었다. 2013년 3월엔 창립총회를 열어 조직 이름을 안심협동조합으로 전환했다.
조합원 200명으로 시작해 1천명이 넘는 동네 가게로 자리 잡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상근자들의 헌신 못지않게 한사랑 어린이집과 아띠 도서관 등 조합 설립에 참여했던 단체의 역할이 컸다. 다들 조합원으로 출자에 참여했고, 어떤 상품을 내놓아도 기본 매출이 보장됐다. 거꾸로 안심협동조합은 신규 조합원과 매장 이용자들에게 기존 단체들의 존재를 알리는 창구가 됐다.
능동적 진화가 거듭됐다. 매달 정기적으로 ‘행복음악회’와 ‘안심영화제’ 같은 문화 행사를 여는가 하면 미술, 기타 동아리 같은 커뮤니티를 꾸려 주민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조합원 수를 늘리는 데도 큰 보탬이 됐다. 한사랑 어린이집과 아띠 도서관의 작풍은 여기서도 오롯했다. 음악회나 영화 상영이 있는 날이면, 매장 직원들과 조합원들은 진열대와 상품을 일일이 매장 앞으로 꺼냈다가 다시 들여놓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 매장 공사나 수리를 맡은 ‘건설교통부’, 전시와 환경 정비를 맡은 ‘환경부’도 조합원 분과로 운영되고 있다.
마을 안에 건설교통부·환경부가
그러나 안심협동조합의 출범이 ‘획기적인 사건’으로 평가되는 이유는 따로 있다. 사회적 경제의 모양새를 갖춘 온갖 조직과 단체들이 만들어져 마을공동체의 다채롭고 풍요로운 생태계를 이루는 데 도화선이 된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로 시작되는 성경의 어떤 구절처럼 그 계보를 따라가다 보면 수많은 조직과 단체의 이름을 마주치게 된다. 삶의 전반을 얼추 아우르는 구성이다. 이들 단체가 2019년 7월 결성한 ‘안심마을 사람들’에는 현재 공식적으로 25곳이 들어와 있다.
‘안심마을 사람들’은 느슨한 연대·협의체다. 가장자리 밖에도 여러 조직과 단체가 겹겹으로 동심원을 그리고 있고, 밖에서 지켜보다 안으로 넘어온 데도 더러 있다. 이곳 생태계의 형상은 고정되지 않는다. 닫힌 구조의 퍼즐 맞추기가 아니라 무한히 열려 있는 레고 게임이다. 현실의 벽을 넘어 필요를 실현하기 위한 생성의 과정을 지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관계에서 중심-주변, 상부-하부를 상상하는 것도 물색없다. 철학자 질 들뢰즈가 말한 ‘리좀’(뿌리줄기 식물) 같은 관계다.
이런 생성의 힘은 다른 데서는 좀체 보기 힘든 조직과 단체들을 출현시켰다. 안심마을의 축제들에는 마술 공연이 빠지지 않는다. 본업이 마술 공연인 협동조합이 있기 때문이다. ‘지역문화공동체 반반협동조합’이다. 행사 기획과 문화예술 교육도 한다. 출발은 ‘마을학교 둥지 사회적협동조합’이었다. 둥지가 운영하는 취미 교육 프로그램 ‘율하는 대학이다’에서 마술을 가르치고 배우던 이들이 내처 협동조합까지 차렸다. 둥지 또한 한사랑 어린이집과 아띠 도서관의 엄마들이 만든 초등학생 방과후 교실이다.
풍요로워진 안심 생태계
‘사회적협동조합 사람 이야기’(‘땅과 사람 이야기’와 별개)는 오로지 발달장애인 일자리 사업만을 위한 조합이다. 발달장애인이 일하는 카페 두 곳을 운영하고 있고, 새로운 일자리 창출을 위한 사업을 벌인다. ‘일자리 배치 위원회’에서 안심마을 전체 일자리에 대한 배치와 전환을 협의해 결정한다. ‘공터 사회적협동조합’은 여러 조직과 단체들의 공간 문제를 고민하다 시작됐다. 마을 사람들이 돈을 모아 2014년에 공터 1호를 준공했다. 2020년엔 조합원 출자에 행정안전부의 지역자산화사업 대출금을 보태 2호를 지었다. 1호에는 발달장애인 단체나 지원시설들이, 2호에는 ‘사람 이야기’ 카페 혁신점과 공유주택 등이 입주했다.
지난봄 안심마을을 찾았을 때, 한사랑 어린이집 원장 윤문주는 마을 신문을 발행하고 싶다고 했다. 마을 활동을 체계적으로 공유하고 외부에도 널리 알리기 위해서라는 거였다. 멀고 막연한 바람처럼 들렸다. 가을에 다시 만났을 때 그는 ‘안심ᄆᆞᆯ’이라는 제호를 단 8면짜리 창간준비호를 대뜸 내밀었다. 발행인과 편집인은 직책 없이 마을 활동만 오래 해온 이들이 맡았다. 윤문주는 “새로운 일은 새로운 사람이 책임을 맡아야 지속성과 확장성이 커진다. 두 분을 열심히 설득해서 모셨다”고 했다.
살가운 연대로 이뤄낸 공생
디자인을 맡은 ‘미래기획’은 안심마을 사람들에 속하지 않는 일반 사업체인데, 안심마을 사람들을 곁에서 오래 지켜본 박기영 대표는 언제나처럼 무료로 일감을 수주한데다 제 돈 내고 광고까지 실었다. 한줄 광고는 종잡기 어려울 만한 내용들로 마을 신문의 진경을 펼친다. ‘노 워, 스톱 워(No war, Stop war) ― 김정화’ 같은 의견 광고부터 ‘부인 고맙소!!! ― 건호·은호 아부지’라는 고백·아부형 광고, ‘집 나간 여권 찾습니다’ 같은 생활 광고까지. 세밑에 다시 안심마을을 찾았을 때는 창간준비 3호가 나와 있었다.
2024년 새해, 안심마을 사람들이 목을 빼고 기다리던 ‘대구 동구 에프엠 공동체 라디오’의 시험방송이 시작됐다. 청취자 못지않게, 발달장애인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의 ‘확성기’ 구실을 중시한다. 방송 기술을 배우고 전수하며 개국을 준비해온 곳은 ‘와글 사회적협동조합’이다. 문화 쪽이라면 와글은 호가 났다. ‘마을문화공작소’라는 이름으로 벌써 100회가 넘는 ‘행복음악회’를 진행해왔다. 행복음악회 또한 마술 공연 하는 반반과 뿌리가 같다. 둥지의 ‘율하는 대학이다’이다.
안심마을은 지금도 능동적 진화를 계속하며 진귀한 종들을 생성하는 중이다. 새로 어떤 종이 생겨나든, 발달장애인과 비장애인은 그 안에서 나란한 곁이 된다.
안영춘 기자 jona@hani.co.kr
안심마을의 단체와 사람들 ③
△반야월 대동계: 안심마을 활동을 위한 기금 조성과 마을 청년들을 위한 대출을 한다. 담보물은 사람에 대한 믿음이다.
△마을학교 둥지 사회적협동조합: 초등학생 방과후 교실이다. 한사랑 어린이집과 아띠 도서관 부모들이 주도해 만들었다. ‘공동육아협동조합 동동 어린이집’도 둥지와 뿌리를 공유하는 자매 같은 관계다.
△지역문화공동체 반반협동조합: 우리나라 최초의 마술 분야 문화예술 사회적기업이다. 코미디(comedy)와 마술(magic)을 합친 코믹 마술 ‘코매직’이 주종목이다. 행사 기획과 진행도 한다.
△와글 사회적협동조합: 마을문화공작소라는 이름으로 10년 동안 ‘행복음악회’를 진행하다 2020년 협동조합으로 전환한 뒤 대구 ‘성서 공동체 에프엠’의 도움을 받아 라디오 방송을 준비해왔다.
△한사랑 어린이집/ 반야월 행복한 어린이 도서관 아띠/ 안심협동조합/ 안심마을 사람들/ 공터 사회적협동조합/ 대구협동조합지원센터: 1회 색인 참조
△유길의: 2회 색인 참조, 윤문주: 1회 색인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