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부장 호무라☆마기카

“오로지 경찰만 만든다 내 이름을 걸고…”

카나메 마도카 2021. 11. 4. 16:23
  • ● “행시 4년, 사시 4년…나는 1차도 못 붙었다”
  • ● 상시 수험생 1500명, 국내 최대 규모 경찰학원
  • ● 2.5t 트럭 3~4대분 책이 일주일 만에 다 팔려
  • ● 내년 안동에 1000명 수용 군대식 기숙학원 설립
  • ● ‘경찰연구소’ ‘폴리스 하이스쿨’…“할 일 많다”

‘김재규경찰학원’을 거쳐 경찰공무원이 된 사람은 대략 1만 명이 넘는다. 경찰학원계에 따르면, 매년 배출되는 순경의 20~30%가 이 학원 출신이다. ‘경찰사관학교’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 학원 김재규 원장은 “내 책으로 공부해 합격한 사람까지 합하면 수만 명이 넘는다. ‘1만 명’은 정말 서운한 숫자”라며 어깨에 힘을 준다.

김재규경찰학원은 국내에서 규모가 가장 큰 경찰전문학원이다. 서울 대방동 본원의 상시 수강생만 약 1500명(기숙생 160명 포함), 매일처럼 들고나는 수험생까지 포함하면 4000명이 넘는다. 광주 분원에서도 수천 명의 학생이 경찰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김 원장은 오래전부터 경찰학원계에서 전설로 통했다. 강의도 유명하지만, 그가 낸 경찰시험 교재들이 나오는 족족 베스트셀러가 됐기 때문이다. 그는 20여 년간 경찰시험 한 분야만 지독하게 파고들었다. 동국대 경찰행정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원광디지털대 경찰학과 교수를 지냈으며,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겸임교수를 맡고 있다.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의 그는 옛날 일을 들려주다 여러 차례 눈물을 보였다.

▼ 어떤 계기로 학원 사업을 시작했습니까.

“원래 꿈은 행정고시에 합격해 군수나 도지사가 되는 거였어요. 봉사하는 삶을 살자고. 그래서 행정고시를 준비했죠. 그런데 지방자치제가 되면서 꿈이 날아갔어요.”

 

▼ 선거를 통해 군수나 도지사가 되면 되잖아요.

“그때나 지금이나 정치에는 관심 없습니다.”

▼ 행정고시 준비를 그만두고 바로 학원계로 온 건가요.

“아닙니다. 사법시험으로 바꿨죠.”

▼ 결과는.

“전패, 한 번도 못 붙었어요. 1차 시험에도 못 붙어봤어요.”

▼ 고시 공부를 얼마나 했는데요.

“8년. 행정고시 4년, 사법시험 4년.”

▼ 고시와 인연이 없었나보네요. 아니면 공부를 제대로 안 했거나.

“아니에요. 모의고사 성적은 늘 합격권이었어요. 그런데 이상하게 본시험만 보면 안 되는 거지, 시험만 다가오면 이상한 증세가 나타나서 시험을 망치고.”

▼ 어떤 증세?

“잠이 안 와요, 불안해지고. 소주 마시고 수면제 먹어야 잠을 잘 수 있었으니까.”

오륙도 보며 울던 소년

시험만 다가오면 찾아오는 알 수 없는 불안 증상. 그게 없었다면 김 원장은 지금 고위공무원이나 판·검사가 돼 있을지 모른다. 그는 증상의 원인을 스트레스라고 진단했다. 과도한 기대로 인해 생긴 중압감.

김 원장은 전남 곡성의 벽촌에서 나고 자랐지만, 공부를 곧잘 했다. 집안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부친은 어린 그에게 “나는 몽당연필 하나 살 돈이 없어서 공부를 못했다. 너는 공부해서 성공해라”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하고 또 했다. 공부에 대한 의무감, 성공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어린 김재규를 늘 짓눌렀다.

초등학교 5학년 때 고향을 떠나 부산으로 ‘유학’을 갔다. 먼 친척집에서 눈칫밥을 먹으며 어렵게 공부했다. 조미료를 설탕인 줄 알고 몰래 숟가락 가득 퍼 먹었다가 배앓이한 것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내일이 안 보이는 하루하루였다.

“학교가 끝나면 용두산공원에 올라가 오륙도를 바라보며 울었어요. 내가 왜 여기에 있나, 지금 뭘 하고 있나…무지 외롭기도 했고. 일본에서 부산으로 들어오는 카페리호가 꽝~ 하면서 기적을 울리면 그 소리에 맞춰서 울었죠. 방학만 기다리며 살았어요.”

 

고등학교는 광주에서 다녔다. 3년 내내 학교와 집만 오갔다. 첫 버스를 타고 갔다 마지막 버스를 타고 돌아왔다. 명문인 조선대부속고교를 수석으로 졸업했을 정도로 성적이 좋았다. 그러나 원하는 대학에는 못 들어갔다. 시험만 다가오면 찾아오는 이상한 증상이 고3 때부터 시작됐다. 시험 때만 되면 글씨가 보이지 않았다. 눈앞에 하얀 점들이 찍히는 듯한 증상 때문에 글을 읽을 수가 없었다.

고시 1차에서 떨어질 때마다 그는 한강으로 갔다. 세상 누구의 인정도 받지 못한다는 것이 그를 절망케 했다. 죽으려고 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러다 아주 우연한 기회에 학원계와 인연을 맺게 됐다. 사법시험 1차에서 떨어져 낙담해 있던 어느 날, 공무원시험 교재를 만들던 출판사에서 원고 청탁을 한 것이다. 현직 경찰들의 승진시험 대비를 위한 문제집이었다. 그는 머리나 식히자는 생각으로 일을 시작했다. 한 문제당 5000원을 받기로 했다. 사법시험 과목이던 형법, 형사소송법, 경제학 문제 출제를 맡았다.

▼ 출판사에서는 어떻게 알고 연락을 한 겁니까.

“제가 그때 신림동에서 아주 유명했거든요, 시험에 떨어지는 고수로. 누군가가 출판사 사장한테 ‘어디어디에 진정한 고수가 한 명 있다’고 귀띔해줬대요(웃음). 그런데 그게 제 운명을 바꾼 거죠.”

 

▼ 그 일을 계기로 고시를 포기하고 학원계에 투신한 건가요.

“아니에요. 그저 잠시 쉰다는 생각이었죠. 그런데 내가 출제하는 문제가 계속 적중하는 거예요. 그때부터 일이 ‘이상하게’ 흘러갔죠.”

“내 책밖에 없었다”

김 원장의 사무실에는 지금도 당시 그가 만든 개당 5000원짜리 문제들이 보관돼 있다. 20년 전 손으로 직접 쓴 문제들. 그에게는 무엇보다 소중한 보물이다. 파일 속 문제들을 하나하나 보여주고, 읽어주는 그의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 난리가 났겠네요.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는다는 게 행복했어요. 솔직히 고등학교 이후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아본 적이 없었거든요. 원하는 대학에도 못 들어갔고, 8년 동안이나 고시에 떨어졌고. 쓰레기 같던 인생에 빛이 들어온 거죠. 그래도 그 일을 오래할 생각은 없었어요. 그래서 곧바로 그만두겠다고 했죠.”

▼ 왜요.

“고시 공부 계속하려고요. 그런데 내가 그만둔다고 하니까 출판사 사장이 오해를 한 거예요. ‘김재규가 돈을 더 받으려고 튕긴다’고 생각한 거죠. 그래서 그랬는지 문제당 가격을 점점 올리더라고요. 7000원, 1만 원, 2만 원…이런 식으로. 결국 책을 한 권 더 내기로 했죠. 그다음엔 내가 직접 교재를 쓰기도 하고.”

▼ 직접 쓴 책은 성공했나요.

“처음 책을 낸 게 1997년입니다. 형사실무 교재였는데, 그야말로 대박. 아니, 대박보다 더 대단한 표현이 있으면 좋겠는데…. 몇몇 서점과 방문판매를 통해 팔았는데, 얼마나 많이 팔렸냐면, 2.5t 트럭 3~4대분을 파는 데 일주일이 안 걸렸어요. 갖다놓으면 바로 나가는 겁니다. 그 책을 내면서 ‘경찰승진연구회’라는 출판사도 만들었는데, 현재 저희 학원에서 쓰는 교재가 모두 그 출판사를 통해 나오고 있습니다.”

▼ 그 책이 본인의 이름으로 낸 첫 교재였습니까.

“내 이름으로 낸 건 아니었어요. 내 이름을 걸고 쓴 책은 그다음에 나왔죠.”

김 원장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첫 저서를 낸 건 2000년 5월이다. ‘경찰학개론’ ‘수사 Ⅰ·Ⅱ’였다. 이 책들이 김 원장의 인생을 바꿨다. 경찰학원계의 ‘스타 탄생’이었다.

“2000년에 경찰시험 과목이 바뀌면서 경찰학, 수사학이 새롭게 지정됐어요. 아주 생소한 과목이었죠. 당연히 교재도 없었고. 공부할 책이 없으니 수험생들 사이에 큰 혼란이 벌어졌죠. 그때 제가 경찰학, 수사학 교과서를 낸 겁니다. 대한민국에 경찰시험 교재가 내 책밖에 없는 상황이 된 거죠. 그러니 얼마나 많이 팔렸겠어요. 대박 정도가 아니었죠.”

▼ 시험과목이 바뀐다는 걸 알고 준비한 겁니까.

“경찰학과 수사학은 현직 경찰의 승진시험 과목이었어요. 그런데 제가 오랫동안 경찰 승진시험 문제만 냈잖아요. 그러니 금방 책을 낼 수 있었죠. 그런데 문제는 책이 나온 다음이었어요. 책은 불티나게 팔리는데, 강의할 사람이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학원들이 모두 저를 찾아와 강의를 부탁했어요. ‘대한민국에 수사 관련 교재는 당신 책밖에 없다. 그러니 당신이 직접 강의를 해줘야겠다’고. 잠시 머리 식히려고 시작한 일이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번진 거죠.”

▼ 사법시험에 미련은 없었나요.

“포기한 건 절대 아니었는데, 솔직히 시험 준비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요.”

▼ 강의는 잘됐나요.

“해보니까 소질이 있더라고요(웃음). 학생들도 좋아하고, 슬슬 재미가 붙고. 강의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웃돈 받고 노량진으로 스카우트 됐을 정도니까.”

 

수강생 500명에 변기는 1개

노량진에서 강의를 시작한 지 몇 달 만에 그의 강의를 듣는 수강생은 1800명을 넘어섰다. 전무후무한 기록이었다. 여러 군데 학원을 옮겨 다녔는데, 가는 곳마다 수강생 수백 명이 그를 따라다녔다. 그렇다고 노량진 생활이 마냥 행복했던 것만은 아니다. 스타 강사로 이름을 날렸지만 갈등도 많았다. “학원에 소속돼 있을 때는 학원장과, 학원을 직접 차린 뒤에는 건물 소유주와 많이 다퉜다”고 한다.

“저는 늘 수강생들을 책임지고 싶었어요. 돈보다는 합격이 중요했죠. 그런데 학원장들은 대부분 그저 돈을 버는 데만 관심이 있었어요. 예를 들어 시험이 코앞으로 닥친 수강생들에게 무료 특강을 해주고 싶은데, 학원장들은 다들 정색을 했죠. 왜 돈을 안 받느냐고. 그런 문제로 만날 싸웠어요.

노량진의 대형 건물에 학원을 열었을 때는 학생들이 순식간에 몰려드니까 건물주가 욕심을 부렸어요. 저를 내쫓고 자기가 학원을 운영하려고. 매일 깡패들을 보내 수업을 방해했어요. 복도에 침을 뱉고, 학생들에게 시비를 걸고. 그런데 3년쯤 지나니까 깡패들도 제 편이 되더라고요. ‘앞으로는 조용히 하겠습니다. 대신 건물주에게는 우리가 원장님을 엄청 괴롭혔다고 말해주세요’라는 녀석도 있고(웃음). 아무튼 어딜 가든 수강생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었어요.”

▼ ‘김재규경찰팀’이라는 이름 때문에 더 유명세를 탔죠.

 

“자기 이름을 내걸고 고시학원을 하는 사람은 드물어요. 그래서 더욱 이름을 걸고 싶었어요. 본의 아니게 여러 학원을 옮겨 다니면서 수강생들에게 피해를 준 것도 마음에 걸렸고. 그래서 어느 순간 생각을 바꾼 거죠. 내 이름을 걸고 학생들을 책임져야겠다고. 저 스스로에 대한 약속 같은 거였어요.”

▼ 박정희 전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과 이름이 같아서 더 잘 알려졌겠어요.

“한번 들으면 절대 잊을 수 없는 이름이죠.”

▼ 여기저기 학원을 전전하다보면 별일이 다 있었을 텐데.

“2001년인가? 동작경찰서 바로 옆에 작은 학원을 냈을 때가 기억나요. 일주일에 60시간을 강의하면서도 여러 권의 책을 쓸 때였죠. 한 번도 힘들다거나 지친다는 생각을 안 했어요. 500명 이상이 강의를 들었는데, 책상이 없어서 신문지를 깔고 수업을 했을 정도였어요. 학생 500명에 화장실 변기는 하나. 지금도 생생합니다.”

체력시험 대비용 헬스클럽

서울 동작구 대방동 ‘김재규경찰학원’ 본원.

 

▼ 돈은 많이 벌었겠습니다.

“안 그래요. 그때 저는 어떻게 해야 돈을 버는 줄 몰랐어요. 지금 같았으면 큰돈을 벌었을 텐데. 많이 벌어도 관리가 전혀 안 됐죠. 그런데 이상한 게 하나 있어요. 제가 학원을 차린 곳은 모두 텅텅 비어 있던 곳이었어요. 한데 제가 들어가기만 하면 학생들이 구름처럼 몰려와서 동네 전체가 대박이 나요. 지금 여기, 대방동 본원도 제가 들어올 때는 빈 건물이었어요. 우리 학원이 들어온 뒤로 상권이 살아났어요.”

▼ 경찰학원만 고집해온 이유가 있나요.

“제 성격이 그래요. 한 우물만 팝니다. 오로지 경찰공무원만 만든다, 내 이름을 걸고. 이 생각 하나로 20년 가까이 버텼어요. 경찰 분야에서는 최고가 되자, 그 생각 하나였어요. 제 생각이 적중했다고 믿습니다.”

김재규경찰학원은 다른 학원과는 여러 면에서 차이가 난다. 일단 운영방식이 다르다. 일반적으로 공무원 시험 대비 학원은 과목마다 강의료를 받는 식으로 운영한다. 학생들은 수업이 있는 시간에만 학원을 찾고, 이외 시간엔 각자 알아서 공부한다. 그러나 김재규경찰학원은 학교처럼 운영된다. 이름하여 ‘회원제’ 방식이다. 일정 기간 등록을 하고 들어간 수강생을 학원이 하루 10시간 이상 잡아놓고 가르치는 구조다. 대학 입시학원 종합반과 비슷하다.

이에 대해 김 원장은 “오래전부터 내가 꼭 해보고 싶었던 운영방식”이라고 설명했다. ‘스타 강사’ 없이 전국 최고의 합격률을 기록하는 것도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스타 강사로 인해 비용이 올라가고, 그 비용이 학생들에게 전가되고, 그러다 어느 단계에 이르면 학원이 문을 닫는 악순환이 학원계를 멍들게 합니다. 저는 스타 강사보다 팀워크를 중시해요. 합격할 때까지 수험생들을 책임지는 시스템이 제겐 더 중요합니다.”

그는 학원 CEO이면서 학원 인근에 식당도 운영하고 있다. 일각에선 “학원장이 식당까지 차려놓고 돈을 번다”며 비난하지만, 그에게는 그만한 사연이 있다.

“저는 8년 동안이나 고시 공부를 하며 고시원 밥을 먹어본 사람입니다. 못 먹는 게 얼마나 서러운지 알아요. 오래전부터 우리 학생들에게 좋은 음식을 먹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저는 아무리 바빠도 식당에서 쓰는 쌀만큼은 제가 직접 주문합니다. 제가 집에서 먹는 것과 같은 쌀로요. 그리고 저희 식당에선 조미료를 전혀 쓰지 않습니다.”

수업이 진행 중인 서울 대방동 본원 강의실에서.

 

 

김재규경찰학원은 수험생을 위해 200평(660여 ㎡)이 넘는 규모의 헬스클럽도 운영한다. 경찰시험 필수과목인 체력시험을 준비할 수 있도록 마련한 공간이다. 기존 학원계 상식으로는 이해 못할 일이다.

김 원장은 대형 학원 CEO인 지금도 직접 강의에 나선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일주일에 이틀은 하루 10시간씩 강의를 한다. 월요일엔 서울에서, 목요일엔 광주에서. 단 한 번도 휴강이나 결강을 한 적이 없다. 특히 그는 광주 분원에서 하는 강의에 애정을 갖고 있다. 광주 학원의 설립 과정이 그에게는 남다른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광주 학원 얘기를 하면서 한동안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어머님이 광주에 사세요. 2007년에 어머님이 사고로 손에 큰 화상을 입으셨어요. 손가락 3개를 절단하셨습니다. 화상처럼 무서운 게 없더라고요. 피눈물을 흘리며 고통을 참으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 일을 겪고 난 뒤 광주에 학원을 내기로 했죠.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매주 어머니를 찾아뵙기 위해서요. 매주 서울과 광주를 오가며 강의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죠. 그러나 제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일상이 됐습니다.”

‘합격해야 나갈 수 있다’

요즘 김 원장은 새롭게 시작한 일로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내년 초 경북 안동에 문을 열 기숙학원 준비다. 올해 초 김 원장은 폐교가 결정된 안동의 건동대를 인수했다. 이곳에 국내 최대 규모의 공무원 시험 전문 기숙학원을 설립할 계획이다.

 

“기숙학원이 앞으로는 학원계의 트렌드가 될 거라는 확신이 있었어요. 지난 4년간 기숙학원을 운영한 노하우도 있고요. 제가 건동대 이사장님께 ‘망해주셔서 감사하다’고 했어요. 대신 ‘제가 이사장님의 명예를 반드시 회복시켜 드리겠다’고 했죠.”

▼ 어떤 기숙학원을 만들 겁니까.

“당연히 경찰공무원을 위한 학원입니다. 거기에 일반공무원, 소방공무원을 아우르는 형태로 만들려고 합니다. 최소 1000명, 최대 1500명이 기숙하면서 시험을 준비하는 곳이 될 겁니다. 이곳에서는 스마트폰과 컴퓨터를 못 씁니다. 외출, 외박도 없습니다. 모든 수험생이 같은 옷을 입고 같이 생활하면서 오로지 시험공부만 하게 됩니다. 합격하기 전에는 학원을 나갈 수 없습니다. 10만 평(33만여 ㎡)의 부지에 운동장, 체육관 등 편의시설을 갖춰 모든 시험 준비가 한 번에 가능합니다. 공무원 시험의 메카로 만들 겁니다.”

▼ 완전 군대식이네요.

“네, 맞습니다. 그간의 경험에 따르면, 기숙학원의 합격률이 일반 회원제보다 2배가량 높습니다. 게다가 공동생활을 하면서 개인주의는 줄고 협동심, 공동체의식은 커지는 걸 실감하죠.”

▼ 또 다른 계획이 있다면.

“우선 안동 기숙학원을 성공시켜야 하고요. 그런 다음에는 수도권 지역에도 대형 기숙학원을 만들 생각입니다. 또 고등학교 때부터 경찰 공무원시험을 준비할 수 있도록 하는 ‘폴리스 하이스쿨’도 계획하고 있어요. 검정고시를 통해 고등학교 졸업자격을 딴 뒤 바로 경찰 시험을 준비할 수 있도록. 경찰행정, 경찰 관련 연구활동을 목적으로 하는 연구소도 만들 예정입니다. 이름도 정해놨어요. ‘김재규경찰연구소’라고, 하하.”